서울대 입시보다 더 까다로운 일제 지원병 모집-2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4&num=212393
노용우 소위
1945년 일본 본토결전에서
B29 편대가 시즈오카에 출현했을때 출격
B29 격추
서울대 출신은 하늘같은 대선배에게 묵념
박동훈 소위
조선인 가미카제 요원 16명중에서
가미카제에 제일 먼저 신청
1945년 3월 29일 오키나와 중부 카데나 해상에서 전사
저 자연스러운 미소를 봐라.. 저게 어디 압정시대에 지을 수 있는 표정이냐 ?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to9092&logNo=221071830210&from=search&redirect =Log&widgetTypeCall=true&topReferer=http%3A%2F%2Fsearch.naver.com%2Fsearch.naver% 3Fwhere%3Dnexearch%26sm%3Dtol_hty%26query%3D%25BF%25CD%25C0%25FC%25BF%25C1% 25BC%25E2%26url%3Dhttps%253A%252F%252Fblog.naver.com%252Fato9092%253FRedirect%253DLog% 2526logNo%253D221071830210%26ucs%3DOBlxR5KEjYSK&directAccess=false 와전옥쇄(瓦全玉碎: 온전한 기왓장과 부서진 옥) 구차하게 살아남는 것(와전) 보다 장렬하게 죽는 게(옥쇄) 낫다는 뜻이다. 중국 역사서 '북제서(北齊書) 41권 원경안전(元景安傳)'에 나온 대장부 영가옥쇄 하능와전(大丈夫 寧可玉碎 何能瓦全) '장부는 차라리 옥(玉)처럼 아름답게 부서질지언정(碎) 구차하게 기와로 남지는 않으리' 즉 옥쇄와전(玉碎瓦全)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옥쇄(玉碎 : 교꾸사이)란 말은 언제부터 쓰이게 되었을까? 대표적인 일본군의 옥쇄작전으로 알려진 것은 아래와 같다. 1943년 5월29일 아투(Attu) 섬에서 2,650명이 전멸(생존 13명) 1943년 11월 25일 마킨(Makin)타라와(Tarawa)섬에서 4,836명 전멸(생존 17명) 1944년 2월 6일 콰잘란(Kwajalein) 제도에서 7,850명 전멸(생존 263명) 1944년 7월 7일 사이판(Saipan) 섬에서 41,280명 전멸(생존 2,300명) 1944년 8월3일 티니안(Tinian) 섬에서 8,000명 전멸(생존자 없음) 1945년 1월 18일 페릴류(Peleliu) 섬에서 3200명 전멸(생존자 446명) 1945년 3월 17일 이오지마(Iwo Jima) 섬에서 28,000명 전멸(생존자 1,033명) 옥쇄(玉碎)는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명예나 충절을 위해 깨끗이 죽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옥쇄(玉碎)의 반대말은 와전(瓦全)인데, '옥이 못되고 기와가 되어 안전하게 남는다'는 뜻으로 '보람 없이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감'을 비유한 것이다. [출처] 와전옥쇄(瓦全玉碎: 온전한 기왓장과 부서진 옥)|작성자 미니향수사랑
https://blog.naver.com/oscct/221433801026 아래 자료는 군인, 군속을 합쳐 총 24만 명의 조선인이 전쟁에 나가 9.2%가 전사했다고 나온다. 군속 12만은 전원 지원자들이었다. 군인은 지원병과 학병(2천여 명 추산)을 합쳐 2만명이다. 군인 학병 모두 합하여 총 14만 명이 자원 입대했다. [출처] [공유] 일제침략전쟁에 협력한 조선인 사례|작성자 개화
일본에서 교육받은 조선인들 일제시대 배출된 조선인 장교들을 우리는 친일파라고 욕하지만, 북괴의 무력침공을 결사적으로 저지하며 자유 대한민국을 사수한 것은 그들이였다 . 그러나 그들과 정반대로 김일성과 손잡고 대한민국을 불법 무럭 침공하여 동포에게 극악무도한 살상과 파괴를 자행한 북괴군은 과연 누구였을까? ? 일본 군가를 부르며 일본이 승리한다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저게 저 당시 조선인의 트렌드 2분 32초부터
그 당시 아시아 연합 |
반면에 광복군 숫자는 ..??
교과서와 언론에서 하도 광복군 ~ 광복군 하길레
수만명 수십만명이 되는줄 알았다 .. 근데 단 339명
조선이 얼마나 백성을 개취급했으면
백성이 독립군이 된 숫자보다
일본군으로 자원입대한 숫자가 수천배 많으니 ....
이런 사실이 부끄러워 강제로 끌려갔다고 사기를 치고
독립군이 엄청 활약한것 처럼 교과서에다 싸질러 놓은..
대통령
2018년 8,15 광복절 대통령 경축사에서
"""우리의 독립투쟁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치열했습니다.
광복은 결코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선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함께 싸워 이겨낸 결과였습니다.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힘을 모아 이룬 광복이었습니다. """
.........................
그러나 진실은....
치열한 독립투쟁끝에 쟁취한 광복이라면서
SF회담에도 초대받지 못하고
승전국인데
힛틀러의 독일처럼 국토가 분할 점령당하고
연합국이 주최한 전범재판에서 전범 148명이 확정되고
23명이 사형집행 당하는 승전국도 있는가?
그리고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면서
조선인들에게 왜 이런 위협적인 포고문을 던졌을까?
연합군 사령관의 포고문
포고 제1호
조선주민에게 포고함
..
제 3조 .. 점령군에 대하여 반항행동을 하거나 또는 질서 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용서없이 엄벌에 처함.
......................
이와같이 연합국에게 점령을 당했었는데
치열하게 일본과 전쟁하여
우리 스스로 독립을 쟁취한것 처럼 역사를 속이고
혹세무민하는 우리의 날조 역사
------
그리고 광복군이라 칭하는 339명은
중국군이 죽기살기로 일본군과 싸우고 있을 때에도
자기들끼리 모여서 기념 사진이나 찍고 있었지
한번도 일본군과 싸운적이 없었다
일본군과 싸우기는 커녕,,
일본군에 지원하여 연합군과 싸우다
연합군에 붙잡혀
사형집행된 조선인만 23명
--------------------
일본군이 만주 중국 아시아를 제패하는것을 본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일본군에 지원하기 위하여 자기를 꼭 뽑아 달라고
손가락을 짤라 혈서를 썼지만
광복군에 손가락 짤라 지원한 조선인이
단 한명이라도 있었는가??
이렇게 조선인들이 자청하여 혈서까지 쓰며 일본군에 지원하여 연합군을 상대로 싸웠는데 한반도에 상륙한 연합군이 조선을 어떤 기분으로 대했을까? 일장기를 끌어 내리고 승전국으로서 성조기를 올리고 있는 모습 |
gall.dcinside.com/board/view/?id=history&no=631306
미군은 실제로 전투 현장에서 일본군복을 입은 조선인을 수도 없이 생포 및 포로로 잡은 경험이 있었던 국가였다. 미군에게 조선인은 일본인과 매한가지인 존재였지, 특별히 다르거나 구별할만한 특징적 요소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미군은 한반도에 최초로 상륙했을 때, 일본과 꼭 같이 점령군으로 들어왔었고, 미 군정법으로 한반도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시대 그 당시 조선인들의 진짜 모습
http://gall.dcinside.com/history/539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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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8세입니다. 이제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최기호 가야대학 객원교수]
나는 1923년생입니다. 이제 한국을 위해,
일본을 위해서도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상당한 각오가 필요합니다. 생명의 위험도 각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사명인 것입니다.
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평양이나 토쿄에 갔습니다.
그 당시의 한국인은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입니다.
극장에 가면 영화의 전에 전쟁의 뉴스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뉴기니에서 일본이 이긴 영상이 흐르자,
박수와 만세의 폭풍우입니다.
나는 영화를 좋아해, 토쿄에서도 갔습니다만, 일본인은 냉정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전원이 미친 것처럼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보통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친일파」라고 하는 말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사용할 수 없는 말」을 사용해,
선조까지 비판하고 있습니다. 「친절하고 상냥한 일본인」이라고 하는 인상을, 필사적으로 지우기 위해
「반일」을 지도자는 꼬드김은 왔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 교육을 비교하면,
일본이 10%왜곡이라고 하면, 한국은 90% 왜곡입니다.
조선말기의 비정상인 정치 부패를 가르치지 않고, 일본이 관여하지 않았으면 독립을 할 수 있던 것처럼
쓰여져 있습니다.
한일합방에 의해 「교육」 「의료」 「공업」 「사회 인프라」가 정비되었습니다. 근대국가의 기초가 쌓아 올려진 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실적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정책의 산물이다!」
라고 규탄하는 한국에는 기가 막힙니다.
더욱 「일제가 민족 산업을 정체시켰다!」라고 하는 주장에는 코멘트하는 기분도 없어집니다
민족 산업을 죽인 것은, 조선왕조입니다. 근대화를 주장하는 선진적인 사상가는 반역자로서 친족까지도 처형되었습니다.
한국인은 「일제의 학대! 성 노예!」라고 외치고 있습니다만,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한제국 시대가 되어도 같았습니다.
1904년 , 일본은 조선의 참상을 구하기 때문에, 재정 지원을 결단합니다.
예를 들면 1907년도 , 조선왕조의 세입은 748만엔이었지만 , 세출은 3000만엔 이상이었습니다.
그 차액은 일본이 부담하고 있습니다. 1908년에는 더욱 증가해 , 3100만엔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H2>현재 88세의 노인의 절규입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
Kim Koo said : "Practically everyone in Korea is a
collaborator. They all ought to be in jail."
김구도 말했다 : "사실상 한국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일제) 협력자다......모두 감방에 쳐넣어야 한다"
- 1948년 마크 게인의 <일본일기(Japan Diary)> 433p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history&no=1606195
조선인 지원병을 격려하고 칭송하는 서정주 시인의
마쓰이 오장 송가
미당 서 정 주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구국대원
구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마쓰이 오장 ,,조선명 인재웅(印在雄) 1924년 개성출신
소년비행병 13기 출신 1944년 11월 29일 필리핀 레이테만에서 전사 )
http://headlines.yahoo.co.jp/hl?a=20160703-00000006-yonh-kr
일제시대 지원병 숫자 ..무려 50대 1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history&no=1784923&page=1
B,C급 전범 중에는 당시 합병해 있던 조선의 조선인과
구 식민지였던 대만인도 있었다.
그 숫자는 조선인이 148명, 대만인은 173명이었다.
조선인 전범은 148명 중 군인은 3명이었다.
1명은 홍사익 중장(사형)이었으며,
두 사람은 지원병이었다.
이 밖에 통역병도 있었던 조선인 16명이
중화민국의 국민당 정부에 의해 심판을 받았고,
그 중 8명은 사형을 당했다.
3,016명의 한국인 포로감시원 중
12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들 129명 전원이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징용되어 타이,
자바, 머레이의 포로수용소에 배속된 군속이었다.
이들 중 14명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군인 군속 통계
일본 후생노동성 (1990년, 1993년 반환 명단, 당시 후생성)의
통계[4]에 따르면 조선인 군인, 군속은 24만 2,341명이며,
그 중 2만 2,182명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 또는 행방불명이 되어 귀국하지 않았다.
작성자 | hana3(rosarian) | 날짜/조회수 | 2015-10-10 09:56 / 17 |
제목 |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한국인은, 아직도 한 명도 없다.
この質問に答えられる韓国人は、未だに一人もいない。
|
1943년의 조선으로의 특별 지원병의 응모자는 30만명 이상, 채용 6300명의 50배 가깝게였다. 대전중은 24만 2341명의 조선국적 청년이 군인·군속으로서 싸워,2만 1천여주가 야스쿠니 신사에 제사 지내지고 있다. 특공대원으로서 출격·산화한 조선국적의 사람은 미츠야마 소위를 포함해 14명이다. 일본의 자위대 이상의 조선국적의 군인과 군속이 있었다. 한국이 국제법상에서 독립을 인정받은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체결시에 체결국으로서 초대되어 있지 않은 나라가 고등학교의 교과서에는 한국은 일제와 싸워 독립했다고 있는 것은 왜입니까? 또, 지원병은 고배율인데, 강제 징병(노예병)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왜입니까? 노예병에게 총을 갖게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한국인은, 아직도 한 명도 없다. |
http://headlines.yahoo.co.jp/hl?a=20160703-00000006-yonh-kr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
지금도 일본에 지원한다
서울 박람회에서
일본 기업에 취직을 지원하는 숫자
연합 뉴스 7월 3일 (일) 15시 54 분배신
【서울 연합 뉴스】한국의 구직자에게 일본 기업에의 취직의 기회를 제공하는
「코리아・캐리어・인・재팬 일본 기업 채용 박람회」가 2, 3의 양일,
서울의 종합 전시장・COEX로 개최되었다.
한국 무역협회에 의하면, 박람회에는 미츠이 스미토모 은행, 전 일본 공수 등
일본 기업 35사가 참가했다.
2000명을 넘는 구직자의 신청이 있었지만,
무역협회의 서류 심사로 선택된
최종 면접 대상자 300명이 박람회에 출석했다.
무역협회는, 박람회를 통해 약 60명이 일본 기업에 취직한다고 예상했다.
지금도 33대1
독립운동의 실상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history&no=1808167&page=4
일본군의 승리에 도취한 조선인들이
일본군을 따라 욱일기를 휘날리며
만주 중국으로 진출하여 중국인을 살해하며
그동안 속국으로 지배받은 설움을 보복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조선인을 2귀자라고 칭하며 두려워 하였다
세계2차대전 일본군 vs 현대 한국군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history&no=1965988&page=1
일본군가를 합창하며
일본에게 감사를 표하는 인도네시아 국민들
'자료→정보→지식→지혜 > 일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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