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16598 ieengf (2007-0-02 1:33:40)
조선의 전통 문화의 보존과 존중에 대한,
조선 총독부의 평범치 않은 노력은,
결코 조선 역대 왕조 이하는 아니다
총독부는, 조선의 관례와 고적에 대해
빠짐없이 조사해, 조선 문화 연구에 대해서,
많은 귀중한 문화유산을 남기고 있다.
총독부는 관례 민속에 관한 조사의 결과, 방대한 서적을 간행해,
중추원은, 이조 시대의 법전류를 편찬 간행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15년부터 1920년에 걸친,
「조선 고적 도감」7권과 해설서 5권을 간행 했다.
그 후, 1919년부터 11년간에 걸쳐 고적을 재조사하여
12권에 달하는「고적 조사 특별 보고」를 간행했다.
1925년 6월에, 칙령으로 「조선사 편집회 관제」를 공포해,
독립 관청으로서「조선사 편집회」가 만들어졌다.
또 총독부는 1913년 12월, 「조선사 편집 위원회 를 마련해
15년의 세월에 걸쳐 합계 35권,
2만 4000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조선사」를 간행했다.
게다가 20종, 100권에 달하는「조선 사료총간」, 및
「조선 사료 사진 및 그 해설」을 간행했다.
일본인 학자로 만든 「조선 고서 간행회」나 「조선 연구회」의 손으로,
수많은 조선 사서가 간행되고 있다.
또한 한반도에 서식하는 각종 식물과 동물 ,
어패류등의 방대한 연구와 기록물
주먹구구식 낙서수준의 엉터리 지도가 아닌
근대식 측량기법으로 제작된 지리부도 ,등등의,,,
그동안 백성들의 피나 빨아 먹는데 혈안이던
무지몽매한 조선왕조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수많은 연구 자료들이 서적으로 발간되었다.
그러나, 조선인 학자에 의하면, 그것들은 조선 통치를 합리화시키고 ,
조선 민족을 열등 민족으로서 왜곡하기 위해서 정리한 것이며,
사료 탈취와 함께 대대적인 사료 수집과 편사 사업은,
조선 지배에 이용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순수한 학문적 연구의 목적을, 조선 민족의 열등성,
후진성과 일제의 조선침략의 합법성을 입증하기 위한 사료 날조
, 사료 왜곡, 황민화 수행의 이용을 위하여
계획된 것이라고까지 굳이 왜곡하거나 곡해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렇다면, 조선 왕조 실록 일성록 승정록을 비롯한
수많은 서적들이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민족마을에서, 조선 왕조시대의 유교의 교과서가
현존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팔만대장경이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이며
지금 한국이 자랑하는 불국사 석굴암을 비롯한
붕괴직전의 수많은 유적을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복구시킨 이유는 무엇이며
금관을 비롯한 각종 국보 보물 유물들을
보존시킨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솔직히 말하여 , 이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 양반 계층이 배운 것은 중국사 뿐이고,
조선사에는 일체 거론 연구도 하지 않았다.
즉 조선사를 직시하는 역사학자는 없었다라는 것이다.
조선인은 꿈도 꾸지 못하는 방대한 연구 작업을
일제가 막대한 자금과 학자를 투입하여 정립시킨 것을
지금 우리는 감사는 커녕, 온갖 음모론으로
일본의 뒤통수를 까며
반일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조선인이 소실시킨 문화재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3&dirId=130102&docId=197790991&qb=
66y47ZmU7J6sIO2bvOyGkA==&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
=SQCjLlpySoGssaIpi0Vsssssst8-440448&sid=7fBYvngXfQ094iiU3s7sUA%3D%3D
[1980년대]
- 쌍봉사 대웅전(보물 163호)
1984년 4월 3일 신도들의 부주의로 불타 버리고 보물에서 해제됨. 전남 화순의 쌍봉사에 있는 대웅전이다. 다른 사찰 건물과는 다른 특이한 점이 보인다. 일반 건물이 아니라,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우리 나라의 2개뿐이었던(지금은 법주사 팔상전 1개 남았음.) 목탑이다. 당시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던 문화재였는데, 화재로 소실되었다.
- 금산사 대적광전(보물 제476호) 화재
1986년 12월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됐고, 지금의 건물은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1635년 중건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의 하나로 정면 3칸, 측면 4칸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을 갖추고 있던 이 건물은 김제 금산사에 있는 대적광전은 미륵전과 함께 금산사를 대표하는 건물이었다. 방화범의 방화로 인해 전소되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가까이 있었던 미륵전은 건물 옆에 소화기가 붙어있어 곧바로 진화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1990년대]
-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보물 제387호)
1997년 3월에 한 성묘객의 부주의로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비각은 전소되고 비신도 많이 훼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전 처리를 한 후에 현재는 경기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어 현재 이곳에는 비각을 받치고 있던 초석들과 귀부만이 쓸쓸히 남아 있습니다. 조선시대 유일한 왕사(왕의 스승)이자,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다고 해서 더욱 유명한 무학대사의 비석이다. 등산객의 실수로 산불이 났었는데, 비각 안에 있던 비석이 아래 사진처럼 훼손되었다.
계속~
'자료→정보→지식→지혜 > 일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짓이야기를 방송했던 MBC 서프라이즈. 민족 반역자 빌리모프스키-2 (0) | 2022.01.15 |
---|---|
거짓이야기를 방송했던 MBC 서프라이즈. 민족 반역자 빌리모프스키-1 (0) | 2022.01.15 |
한 눈에 알수있는 일제시대 변화 (0) | 2022.01.01 |
우리나라 성매매, 해외 원정 성매매 급증. 뭐가 문제일까? (0) | 2021.12.30 |
일제는 문화재를 수탈하였는가?-2 (0) | 2021.12.27 |
서울대 입시보다 더 까다로운 일제 지원병 모집-2 (0) | 2021.12.26 |
서울대 입시보다 더 까다로운 일제 지원병 모집-1 (0) | 2021.12.26 |
왜정시대 중등교육과 학교-3 (0) | 2021.12.25 |
왜정시대 중등교육과 학교-2 (0) | 2021.12.25 |
왜정시대 중등교육과 학교 -1 (0) | 2021.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