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매매 그 역사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으로 알려져 있는 성매매

     

     

    이직업이 오래된것은 사실일지라도 그것이 의사,정치인을 겸하고 때에 따라서는 왕권까지 겸하던 초기 샤머니즘적 요소가 가미된 신관,제사장보다 더오래되지는 않았을것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역사와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매매’다. 현재 성매매는 ‘사회악’이라고 해 법률로써도 규제되고는 있지만 수 천년의 생명력을 자랑(?)하듯 여전히 사회 한쪽에서는 ‘필요악’이라는 구실로 버젓이 성행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살면서부터 성매매는 시작됐다고 말합니다. 

     

    바꿔 말한다면 이것은 가장 오래된 직업의 하나로 밑천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대표적인 장사수단이었던 셈입니다. 기록상으로 전해오는 성매매의 역사는 기원전 5000년 쯤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인들은 신을 신전에 모시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신을 모시며 신전을 지키는 여성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신전에 공물을 바치는 남성들에게 그 대가로 몸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니 이 여성들이 바로 성매매의 원조격인 셈입니다.

     

     

    이와 비슷한 풍습은 고대 인도를 비롯 이집트·아시리아 등에서도 행해졌는데 신전이나 사원 등에서 참배를 하는 남성들에게 몸을 바쳤다고 해서 ‘사원매춘’이라는 명칭이 붙기도 했습니다.

     

    초기의 성매매 설은 분분하지만 성매매가 생겨난 근간은 모계사회만이 존재하던 원시집단사회가 부계사회로 바뀌면서 모권의 역활이 기존의 가족,혈족 통제에서 번식과 육아로 좁혀지면서 생겨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고 이 부권으로의 가족체계 성립은 생산력의 증대와 사유재산의 발달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일부일처제와 성매매가 생겨난 중요원인일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우리나라는 이 성매매가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신라 시대 가무를 담당하던 유녀를 매매춘의 시초로 보는 의견이 있으나 이와 관련해 역사학계는 일치된 의견을 보이고 있지는 않습니다.

     

    강준만 교수는 이와 관련해 “매매춘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그것이 제도로 정착해 널리 성행했는가는 기록과 자료의 부족으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관기제도가 고려로부터 수입되어 기녀라 불리는 여성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기녀가 기생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관기, 민기, 약방기생, 상방기생 등이 여기에 속했지만 이 기생들은 실제 성매매를 한다기 보단 궁중에서 약 제조, 가무 등을 맡아 해왔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에 실제적인 매매춘이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공창제도를 도입한 일본의 영향이 컸습니다.

     

    일본은 16세기 막부시대부터 국가적으로 집창촌을 허용해 왔었습니다. 집창촌이라는 것은 매춘업을 하는 포주와 매춘녀들이 가게를 차려 놓고 영업을 하는 곳을 말합니다.

     

    강제로 조선의 국권을 찬탈한 일제는 조선 내 일본인이 늘어나자 일본의 공창제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성매매를 하도록 해 줍니다. 

     

    일본에서는 집창촌을 유곽이라고 불렀는데 자료에 의하면 1902년에 처음으로 공식적 성매매촌이 조선에 상륙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유곽 매춘지역이 생긴 곳은 부산 중구의 부평동이었습니다. 지금의 국제시장부터 깡통시장을 거쳐 아파트 단지까지의 일대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때는 일본과 가까운 부산이 개항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많이 들어와서 생긴 성매매구역이었지만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강제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후에는 전국적으로 성매매 공창제가 시행되었습니다. 

     

    일제가 직접 법을 통해 허가하고 세금을 받았으므로 정식적인 공창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도 기생은 있었지만 기생의 주 업무는 술시중에 있었고 성매매는 기생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완전히 성매매 직종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엔 직업적으로 성매매를 통해 수익을 얻는 형태이므로 현대와 같은 방식의 집창촌은 일제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후 해방 전까지 지속적으로 매춘지역은 늘었지만 1947년 조사한 바로는 2천여 명이 성매매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미군정이 들어 온 이후 공식적으로 한국은 공창제를 폐지합니다. 법령에 의하면 양성평등의 법적 권리보장을 위하여 시행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완전 폐지에 실패하였습니다. 

     

    현대의 성매매 여성들이 일반 직업 적응실패와 향락, 사치 때문에 매춘을 하고 있다면, 당시의 매춘녀들은 정말로 먹고 살기 막막하여 하고 있었고, 포주들은 강제로 여성을 끌고 와서 매춘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의 성매매 공창제 폐지는 매춘 여성과 포주들의 저항에 부딪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창제 폐지가 시행된 후 1~2년 사이에 성매매를 하는 매춘 여성의 숫자는 오히려 5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일제 때와 달리 구체적인 관리가 되지 않은데다가 미군에 기생하여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 늘었기 때문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엄격한 유교사회였던 조선의 풍토가 완전히 깨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 후 6.25가 발발하고 미군의 수는 더욱 늘었습니다. 사회는 무질서했으며, 실제로 여성이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적었습니다. 

     

    3년간의 전쟁 후 한국의 성매매 매춘여성은 30만 명도 넘게 증가합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 피해가 생기는 와중에도 성산업은 더욱 활황세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때의 역사적 치욕이 또 하나 있습니다. 비공식 자료에 의하면 한국군도 전쟁 중에 위안부부대를 운영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간접적 기록과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약 90여명의 여성들이 4개분대로 나뉘어 하루 약 7명 정도의 군인들에게 성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문제는, 당시 한국군의 책임자급 인사들이 일제 사관학교나 일본군 출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태평양전쟁 때 일제의 위안부 악습을 그대로 가져다가 실시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6.25가 끝난 이후에 한국에는 미군부대가 주둔합니다. 미8군 등 인근에는 흔히 말하는 기지촌 성매매 집창촌이 성업을 하였으며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점점 거대화되었습니다. 

     

    문제는 한국정부도 이를 알면서도 일부러 용인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성매매 여성을 희생시켜서 달러벌이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61년 윤락행위 방지법이 제정됐으나 이는 성매매 근절보다는 선전 효과를 노린 것으로, 정부에서는 주한 미군을 계속 주둔시키기 위해서 기지촌의 성매매를 보호했으며 일본 관광객들의 섹스 관광을 외화벌이의 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성매매 여성들의 집결지 104곳을 특정지역으로 지정했으며 이 지역에서의 성매매를 묵인했습니다.

     

    2013년 국정감사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관리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서명한 기지촌 관련 문건에 대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이 때부터 변태영업의 원조 격인 속칭 한국의 텍사스 촌이 미아리와 천호동에 들어서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미아리의 성매매업은 구청에 일반음식점, 유흥주점 등 술을 팔 수 있는 업소로 등록한 뒤 성매매를 했기 때문에 무허가건물에서 불법영업을 하는 역 인근 사창가와 다른 변태영업이었습니다. 

     

    업주들은 전업형 성매매로 전환한 뒤에도 손님들에게 형식상 맥주 한잔 마시게 한 뒤 성을 판매하는 ‘텍사스’ 시스템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단속을 나온 경찰이 윤락행위를 했다고 추궁하더라도 ‘단지 술을 팔았을 뿐’이라는 충분한 변명거리가 됐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천호동 텍사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8세기 미국 서부개척시대 영화를 보면 1층에서 술을 마시다가 성매매 여성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술집들을 텍사스로 불렀는데, 미아리나 천호동 업주들은 스스로를 텍사스라고 부르면서 기존 사창가와 구별을 지었습니다.

     

    1960년대 한국 국민총생산의 25%가 기지촌 성매매 등의 관련 업종에 의해서였다고 합니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의 85%는 성매매를 경험하였다는 자료가 있고,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여성은 미군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미군 위안부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들은 양공주 혹은 양갈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들 중에는 자의적 돈벌이를 한 여성도 있었지만 인신매매에 의해 팔려 온 여성과 심지어 미성년자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성매매 자체를 목적으로 한 전업형 성매매 대신 유흥주점, 단란주점, 마사지업, 티켓다방 등의 겸업형 성매매와 호스티스, 콜걸 등 겸업형 성매매 직업군이 부상하기 시작합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이 열리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을 의식한 윤락가 정비사업이 실시되고, 네덜란드의 홍등가처럼 커다란 유리창을 갖춘 유리방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까지 미군상대 성매매 여성의 누적인구수는 1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업형 성매매는 1980년대 말에 정점에 이른 뒤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산업형 성매매가 그 뒤를 이어서 늘어나게 됐습니다. 

     

    이때, 현대에 태국 등의 동남아 지역 성매매 관광이 문제가 퍼지듯이 일본 등 주변국은 한국으로 성매매 관광을 오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주요 관광번화가에는 외국인 대상 매춘부들이 실제로 존재하였고, 이런 여성들에 대해 당시 행정부 관료들은 고마운 달러벌이 일꾼이라고 말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는 일설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한국은 국가적으로 성매매 매춘을 지원하고 눈감아 준 것입니다.

     

    그러던, 2000년 군산 대명동 성매매 업소 화재사건(5명 사망), 2002년 군산 개복동 방석집 대가 화재사건(15명 사망)은 성매매 특별법 제정을 가져왔으며 이와 더불어 노후한 집창촌에 대한 남성들의 외면, 전업형 성매매 업소의 발달, 재개발 등은 집창촌 쇠퇴를 가속화시켰습니다. 

     

    현재 집창촌 성매매 여성들이 전체 성매매 여성들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0.6%~1.7%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성매매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지만 우리나라의 성매매 역사는 짧지만 치욕적인 부분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을 직업 중에 하나인 성매매 합법화가 답일지? 지금처럼 불법으로 계속 단속하는것이 답일지? 정답은 없지만 성매매 직업이 사라지지 않는다는것 하나는 확실할 듯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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