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표적인 폭군 연산군
조선을 대표하는 폭군이라면 광해군과 연산군이 있습니다. 2012년 이병헌 주연의 영화 "광해, 왕이 남자"로 인해 광해군의 폭군 이미지는 조금 사그러졌습니다. 하지만 아직 연산군은 우리에게 폭군으로 남아있는데요.
그 연산군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출생 과 어머니의 사사
연산군은 1476년 음력 11월7일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성종은 첫아들을 총애하여 태어나자 마자 원자에 책봉되고 생후 1년만에 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종과 폐비 윤씨는 부부사이가 원만하지 못했고 윤씨의 질투심이 심하여 왕이 다른 후궁과 있는데 갑자기 방문을 한 일 과 격한 부부 싸움 끝에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추정)으로 인하여 그 자리를 노리던 후궁들의 참소를 불러왔고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가진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에 분노를 샀습니다. 결국 윤씨는 성종의 명에 의하여 궁궐에서 축출 되어 사사 당합니다.(1479년)
성장과정
3~5세의 아이들은 엄마에 대해 유착관계가 형성되는 시기임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엄마를 대신 할 수 없는 이 시기에 연산군은 어머니를 잃고 계모인 정현왕후의 아들로 자라납니다. 하지만 정현왕후의 친정아버지와 육촌이 폐비 윤씨 축출에 앞장섰던 만큼, 일반인으로 비유 하자면 쫓아낸 전처소생 아들에게 얼마만큼의 사랑을 주며 키웠을지는 의문이 아닐수 없습니다.
정현왕후를 생모로 알고 자라다가 어느시점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연산군은 정현왕후가 친모가 아니며, 친모인 윤씨는 폐출된것 정도는 알게된듯 합니다. 그게 어떤 충격 이었을지는 우리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한 단면을 살펴 보자면 사춘기 소년 시절의 일탈로 나타나 부왕이 아끼던 애완용 사슴을 활로 쏘아죽이는 등의 행위로 표출 됩니다.
성종도 이 아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있었는지 이 사건을 묵인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머니를 죽게 만든 아버지와 후궁들, 할머니(인수대비)에 대한 적개심이 이런 일탈로 표출되었으리라 추측해 봅니다.
즉위 초의 업적
연산군도 처음 부터 폭군은 아니었습니다.
즉위 초 비용사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지방으로 주민을 이주시키는 한편, 녹도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게 하고 건주의 야만족을 회유 및 토벌하는등 국방에 주력하였습니다.
국조보감등의 여러 서적을 완성시켰으며, 사창, 상평창, 진제창을 설치하여 빈민의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치적들을 볼때 흔히 묘사되듯 그가 처음부터 폭군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삼사를 적절히 억누르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훈구파 대신들과 정치를 이끌어 가던 시기로 보입니다.
하지만 유배생활을 하던 외할머니 신씨와 외삼촌 "윤구"를 석방하고 어머니 폐비 윤씨를 복권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사림의 반대에 부딛히게 됩니다.
두번의 사화
무오사화
연산군은 학문을 어릴때부터 싫어하였고 그의 그릇된 행동을 말하는 신하들 역시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당시 자신에게 끊임 없이 간섭하던 사림세력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고 이때 간신 유자광을 중심으로한 훈척세력이 불을 붙이게 됩니다.
사건은 무오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데 실록청이 세워지고 이극돈이 실록 작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이극돈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하게 됩니다.
조의제문은 진나라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하는 것에 대한 제문이었는데 여기서 김종직은 이를 세조의 단종 폐위를 빗대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또한 이극돈은 자신에 대한 비판을 가한 상소문을 보고 분노했고 훈신세력을 주도하던 유자광을 찾아가 이를 고하게 됩니다.
유자광 역시 김종직을 싫어하던 터라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사등의 훈신세력과 모의하여 조의제문을 예로 들으며 연산군의 할아버지 세조를 비방한 글이라며 대역죄를 덮어 씌운 것입니다.
연산군 역시 평소 사림을 귀찮아하고 싫어하던 터라 이 같은 명분에 옳다구나 하고 김일손을 문초하고 김종직의 문하생들을 제거 하기 시작했으며 이미 죽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형을 가했다. 또한 이때 대부분의 신진 사람이 죽고 유배당하며 조정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에 조정은 노사신등의 훈척 계열이 장악하게 되었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람들이 살육당했다하여 무오사화라고 불리게 됩니다.
갑자사화
무오사화가 지나고 몇년 후 이제 자신에게 옳은 말을 하던 사림 세력이 없자 연산군의 폭정은 나날이 심해져 갑니다.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 폐비윤씨에 대한 안타까움과 어렸을 때 차별 받던 그 순간들을 잊지 않았고 삻았을 것입니다.
폐비 윤씨에 대해 아무리 쉬쉬해도 분명한 것은 연산군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외할머니가 찾아와 폐비윤씨가 사약을 받을때의 피묻은 적삼을 전하자 연산군이 그때 알았다고는 했지만 10년동안의 재위기간 동안 이 같은 사실을 모를 수가 없다는데 동의 하므로 드라마적 요소는 재외하겠습니다.
자 여튼간에 이번 자신의 생모 폐비윤씨에 대한 보복심은 왕권강화와 정권 장악을 위한 계산적인 생각과 맞물리며 조선시대 최대의 사화가 됩니다. 일단 윤씨 폐출에 관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 정귀인을 직접 참하고 그 아들을 귀양보내 사사시킵니다. 또한 폐비윤씨를 내쫒았던 자신의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 받았으며 인수대비는 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후 죽게 됩니다.
그는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 조정을 장악했던 훈척세력마저 척결하고 한명회 같은 세조시대 공신들도 부관참시에 처했습니다. 239명이 이 사화에 휩쓸리게 되었고 그 중 반이 넘는 대신들이 사형을 당하는 엄청난 살육이었습니다.
이렇게 두번의 사하고 훈척세력마저 다 죽이며 유아독존의 자리에 오르게 된 연산군은 당시 문신들의 충고가 귀찮다며 사간원, 홍문관을 업애버리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자신의 행동에 반기를 드는 세력들은 가차 없이 숙청해버립니다.
또한 정사는 뒷전이고 방탕한 생활을 보내며 연회를 열었으며 자신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하는 등의 충격적인 패륜 범죄를 벌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연산군의 몰락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바로 내시였지만 충신이었던 김처선이 죽던 날입니다.
국가나 회사가 몰락의 징조를 보이는 때가 바로 진심어린 충신들이 사라지고, 그자리를 간신들이 채울때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연산군의 행동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면 당시 신분이 낮은 내시가 "무디 폭정을 거둬셔야 하옵니다. 전하" 라고 충언을 했을까요?
그렇게 몰락의 시작을 알린 연산군에게 중종반정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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