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어화영화와 살펴보는 한국의 기생이야기(구한말 기생,현매홍,김옥엽,오산원,김영월,윤채선,이옥란,장연홍,이난향)
영화 해어화입니다.
조선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한 마지막 기생의 숨겨진 이야기를 그린 영화인데요.
영화 마케터가 아니기 때문에 영화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 영화 예고를 보면서 한국의 기생이야기가 하고 싶었거든요.
돌아다니는 사이트가 3군데 정도 있는데 쓰레빠뉴스에 올려보기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반말로^^)
전통적으로 기생은 나라의 경사, 궁중의 큰 행사, 연회 등에서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우는 역할을 했다. 이런 역할은 한 이들은 고대부터 존재했고 그 맥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계속 이어졌다.
기생을 기녀(妓女), 여기(女妓), 여악(女樂)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의 기생들은 주로 관기(官妓, 관에 속한 기생)였는데, 일제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재조직되어 1908년 관기가 해체되고 기생조합이 만들어지면서 일본식 권번 기생으로 변모하게 된다.
기생들은 20세기 초반의 엽서 및 광고를 통해 조선을 대표하는 이미지로서 관광자료로 홍보되었는데, 특히 무용수, 악기 연주자, 풍광 속의 미녀 등으로 연출되어 ‘조선풍속’이라는 제목으로써 특히 수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러한 풍속 관련 사진엽서는 일본의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다이쇼[大正] 사진공예소 등에서 많이 생산되었다.
한편 일제강점기 하에서 기생들은 궁중무 등 전통 공연예술의 맥을 전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이 같은 전통 공연예술 외에도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춤을 개발하는 등 한국 전통 공연 무용을 근대적으로 소화, 개발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또한 기생들은 전통무용 뿐 아니라 서양의 댄스공연도 수용 소화시켜 서구식 무용 공연을 활성화시키는데 한 몫을 하였다. 기생은 무대 위 공연 외에도 각종 공적인 연회, 박람회, 운동회, 자선 연주회 등 민간의 여러 잔치에도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이런 가운데 기생으로서 가수 등으로 진출하여 대중 스타로 거듭나게 된 이들도 있었다.
미모에 기예를 갖춘 전문 예술인으로서 많은 주목을 받았던 기생들은 20세기 근대 문화 속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였다. 바로 패션이었다. 기생들은 서양의 신문물 패션으로 상징되는 양산, 스카프, 핸드백 등 소품과 액세서리들을 한복과 연출하여 자신을 꾸밀 줄 알았고, 이러한 연출 방식들은 새롭게 당시의 유행을 이끌었다. 기생들은 이렇게 패션 리더로서 주목받기도 하였다.
기생(기녀)는 춤·노래·풍류 등으로 주연석이나 유흥장의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관기,민기,약방기생,상방기생 등 예기의 총칭이다. 그녀들은 천한 몸의 신분이였지만 춤, 노래, 시 에 능한 예인으로 지식으로서 대접을 받는 존재였다. 기생의 제도는 조선시대에 발전하여 일반적으로 기생이라고 하면 조선시대의 기생을 지징하게 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의 시대를 거치며 기생은 여러가지 사회적 활동에도 가담하게 되었다.
기생이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대력 삼국시대에 형성되었으며, 무녀를 그 시원으로 보고 있으며, 고구려 벽화의 종교적 색체를 띠고 가무를 하는 예인 집단들도 기생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기생은 국가에 소속된 기녀, 즉 관기 신분에 속하고, 그 시대에도 지방보다는 서울읭 관기인 장악원이라는 기관 소속에 있는 기생들은 기예가 우수했다고 한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하여 "헤어화" 라고도 불리던 기생은, 양반들과 학식 높은 유생들을 상대하다보니 악기 다루는 법과 서화와 학식등을 익히는 장기간의 교육 과장을 거쳐야 했다.
초일류 기생을 "명기"라하고, 나라를 위해 의로운 일을 하는 기생을 "의기"라 하였는데, 기생들의 민주적인 운동의 대표적인 것이 1919년 전국의 독립만세운동, 3.1운동이다. 이들은 십대 여학생들과 더불어 전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들 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여성 고유의 영역에서 벗어나, 남성들과 교류하는 사회적 영역에 존재하는 계층이자, 풍유를 즐기는 여인들은 그저 당시 조선 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사상을 불 지르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일본 경찰들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뤘지만 그녀들은 굴복하지 않고 논개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독립사상을 설파 및 조직을 만들어 항일 운동에 힘쓰기도 하였다.
기생들의 삶은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많은 성격이 변화하였고 사회적 진출이 활발해 지면서,조선 사회가 인습과 관계에 얽매어 있었을 때, 가장 먼저 그 억압의관계를 끊어 버린 존재들이었다고 한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기생과는 너무나 다른 그들의 삶, 인간을 사랑하고 춤과 노래에 능하고 박식했으며, 국권을 빼앗긴사회구성원으로서 독립운동을 했던 그녀들을 매춘부와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은, 우리들에게 지금의 순간을 남겨준 그녀들에게 범하는 큰 죄일 것 같다.
지금으로 따지면 연예인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몸만 파는 창녀로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오산이다. 매춘을 업으로 삼는 부류는 기생 외에도 따로 있었을 뿐더러 주로 매춘을 하는 쪽으로 타락한 기생도 있긴 있었으나 이들은 기생 중에서도 하급인 삼패기생이었다. 영어로 번역할 시에도 창녀와 하급기생은 'prostitute'로 쓰지만 풍류를 읊는 고급기생은 'courtesan'이로 구분해서 번역한다. 멀쩡히 결혼해 남편이 있는 경우도 많았다.
고급 기생(기생이나 은근짜)들은 각자 집과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혼도 했다. 일패의 경우 궁궐에도 출입했다. 양반들은 자신의 후원에 따로 부르거나 교외로 나가서 춤과 음악을 즐기거나 학문이나 시, 글, 그림 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양반들조차 어지간한 명망이 있는게 아니면 일패기생을 쉽게 부를 수 없었다 한다. 주된 고객층은 상류층이었기 때문에 춤, 노래, 시조, 화예, 학문 등 수많은 예를 겸해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관리하는 '기생청'이 존재 했을 정도이다
일단 기예가 뛰어난 기생이라면 신분이 천민이라도 지식인으로 인정받는다. 굳이 따지면 교양과 가무를 갖춘 연예인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애초에 높으신 분들을 매일같이 만나야 하는데 교양없는 천것들을 쓸리가 없다. 아무리 삼패기생이어도 일단 낮은 수준의 기예나마 보장되어 있었으며, 이들조차 아무나 만날 수 없었다. 가장 낮은 삼패라도 만나려면 돈이 꽤 필요했다. 굳이 현대에 대입하자면 급에 따라 고급 연예인(일패), 스폰서를 둔 연예인(이패), 텐프로(삼패) 정도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조선시대의 창녀는 들병이, 화랑유녀, 작부 등으로 분화되어 있다. 들병이는 들병에 술을 담아 떠돌며 파는 이들이었는데 매음도 했다. 화랑유녀는 절 주변에서 매춘을 하는 여자였다. 작부는 술집에서 술과 몸을 파는 이들을 가리켰다. 기생이 창녀인 것이 아니라 창녀는 따로 있었다. 사당패도 떠돌아다니며 공연하면서 매춘을 겸했다.
원래는 이처럼 예술인 취급을 받았던 이들이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회기강이 무너지자 매춘 유무에 따라 은근짜와 더벅머리로 분화되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매춘부 취급을 받게 된다. 현재 기생=창녀라는 인식은 이 시기와 현재 사극들의 영향이다.
이에 조선시대에 '선비문학'을 제외한 예능은 전부 천한 것으로 치부했다는 것과 결합하여 오해가 더 심해진 경향도 있다. 이는 기생 외의 예술에 있어서도 그렇다. 이례로 그 당시 사군자, 풍경화를 제외한 그림들, 대표적으로 민속화 등은 '환'을 친다라고까지 표현했다.
지금까지 전승되는 전통예술(춤이나 음악 등)은 상당수가 기생들에 의해 전승된 것이다. 즉, 이들은 전통 예술을 전승하고 가르치는 역할도 겸했다.
구한말에 '서양의학'이 보급되었을 때 유교적 사상이 제대로 박혀있는 국내에서는(소위 남녀칠세 부동석) 간호사를 구하기 힘들어 결국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고 남자에게 손을 댈 수 있는 '기생'을 간호사로 뽑았다.
일제강점기에는 권번에 기적을 두고 3년동안 기예를 배운 뒤 배반에 합격해야만 기예증(技藝證)을 받아 소위 말하는 일패기생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기생청은 총독부의 일본 유녀 권번 벤치마킹에 의해 권번이라는 일종의 조합으로 바뀌었다. 이 권번은 기생들을 양성하는 학교 역할도 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공식 교육기관 중에선 전통 예술을 계승하는 사실상 유일한 곳이었어서 의의가 꽤 크다. 한 예로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국악인들 중 상당수가 권번 출신 기생이었거나 권번에서 기생들을 가르치던 교사 출신이다. 당시 기생들의 항일 의식이 투철해서 3.1 운동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평양 기생 학교의 경우 강점기 초엔 400명의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평양 기생들과 진주 기생들은 아예 기생들의 만세시위를 주창하며 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평양 기생들은 "우리는 일본의 창녀가 아니다! 조선 기생들은 나라를 사랑한다!"며 가두시위에 참여했고, 진주 기생들은 "임진왜란을 기억하라! 왜병들에게 돌을 던져라!"라며 매우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강점기에 일본에서 유녀를 데려와 경성의 신마치(현재의 서울 중구 쌍림동), 혼마치(현재의 서울 명동)에 공창 지역을 설치하여 기생 제도는 점점 그 규모가 작아진다. 부산의 경우 미도리마치(완월동)에 일본에서 건너온 유녀들이 유곽을 형성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흥가의 첫 시작이 된다. 권번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제의 강요로 1942년에 폐지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사실상 기생이란 개념이 사라지게 된다. 해방 후 그때까지 존재했던 기생들은 예능인으로 전환하거나 대도시의 요정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물론 기생 일을 그만두고 평범한 생업을 찾아간 여성들도 적지 않다.
유명한 평양 기생의 경우,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까지만 해도 남아있었다. 당시 백선엽이 평양을 점령한 후 평양 기생들이 아직 잘 있는가 궁금하여 찾아가 봤는데, 그때까지도 영업을 하고 있었다 한다. 음식을 주문하고 술을 시켰는데, 흥분한 기생들이 자기들이 술을 다 마시고 공산당 욕을 막 하더란다. 자기들이 즐기고 싶어서 기생집 운영을 강제로 시키고는, 인민들의 눈이 두려워 검은 옷만 입게 하질 않나, 음식이고 술이고 비싼 것을 잔뜩 먹고는 돈은 한푼도 안 내질 않나, 하고 기생들이 공산당 욕을 쏟아내었다고. 그래서 평양 점령 기념으로 회포를 푸려던 술자리는 기생들의 하소연 자리로 변해 버렸다 한다.
장연홍
평양 기성권번 출신으로 상경하여 조선권번등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예쁜 얼굴에 비해 두드러지게 활동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홍콩유학길에 오른뒤 소식이 두절됐다.
평양 기생 장연홍 그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최고의 미녀라고 한다.
이난향 (1900~1979)
이난향은 평양 태생으로 15살에 서울로 와 당대 가장 유명한 4대 기생조합중 하나였던 조선권번에 입적하였다.
이난향은 이왕직아악부 지도사범 하규일(1867~1937. 이 분은 근세 가곡의 거장임)로부터 정악가무일체를 배웠으며,
하규일의 수제자로서 하규일로부터 자신의 모든 제자를 통틀어 가장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았다.
이난향은 모든 노래를 두루 잘 불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잔노래와 가사가 장기였다.
그녀가 부르는 가사는 전달이 분명하고, 명쾌한 시김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을때, 한 신문사 기자와 결혼해 기생일은 청산하고 집안살림에 전념하게 된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여 결혼 후에도 틈날 때마다 하규일에게 노래를 배우며 연달아 노래 네 바탕을 배웠을만큼
가곡 수련에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그 열성으로 가곡으로는 첫 레코드판을 녹음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레코드판은 현재 국악음반박물관에 소장중이다.
덧붙여 주목할만한 부분은 현재 가곡전수관 관장을 맡고 있는 인간문화재 조순자 명인(1944~) 역시 그녀에게 가르침을 사사받은 제자이다.
<다음은 이난향이 언급된 '삼천리 8권 6호'에 실린 내용 전문이다.>
이난향의 본 이름은 선비이다. 대정 8년부터 기생으로 나섰으니 난향이 나이 19였다.
평양이 역시 그녀의 고향이었고 춤 잘추고 노래 잘하고 양금 잘 타기로 그 당시 장안의 남자들은 어누 누구 모르는 이가 없었다.
더욱이 이난향은 얼굴 잘나고 거동 곱고 말소리가 맑을 뿐더러 하나 물으면 열을 아는 재주덩어리였으니
그것은 난향의 맑은 두 눈동자와 넓죽한 이마에 그 재주가 들었다고나 할 것이다. 글 잘하는 사람들도 난향이요. 돈 잘 쓰는 궐자들도 난향이었다.
그러더니 난향이 기적에 몸을 둔 지 15년째 되는 소화 8년 봄, 꽃피고 새 지저귀던 때 그녀의 나이도 30년의 고개를 넘게 되니
머지않아 닥쳐올 얼굴의 주름살을 막을 길 바이없음을 느꼈던지 난향은 영남의 어떤 부호의 사랑과 짝을 지어 화류계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지금에는 아들 딸 많이 낳고 무심한 세월만을 손꼽고 있으리라.
예전에 걸그룹 에프엑스(f(x))의 멤버 ‘설리’가 20세기 초 유명 기생 이난향(1900~1979)의 꼭 닮은 얼굴로 화제에 올랐었다.
이난향의 얼굴 사진을 나란히 놓고 보면, 두 사람은 처진 눈매와 갸름한 얼굴형, 도톰한 작은 입 등이 꼭 닮았다.
20세기 초 기생은 오늘날의 연예인이나 다름없었다. 춤 등 전통예술을 계승하면도 레코드판 취입 등 새로운 근대 예술과 패션을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 이난향은 그 중에서도 유명한 기생이었다. 평양 출신으로 당대 4대 기생 조합 중 하나인 조선권번에 입적했으며, 빼어난 미모와 노래 실력으로 명기로 꼽혔다. 근세 가곡의 거장 하규일에게 시사를 받고 가곡으로는 첫 레코드 판을 녹음하기도 했다. 또 현 가곡전수관 관장인 인간문화재 조순자 명인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사진을 본 누리꾼들은 “설리, 환생인 줄 알았다”, “100년 전이나 후나 미인을 보는 기준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네” “눈이 특히 닮았다”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절세가인이나 남자를 희롱하는 재주로 꼽는다면 아마 다른 이가 뽑힐지도 모르겠으나
시를 잘 쓰고 악기와 가무에 능한 기준으로 뽑은 조선조의 3대 기생은 개성기생 황진이, 전라도 부안기생 이매창 그리고 평안도 성천기생 김부용이라 할 것이다.
혹자는 김부용 대신에 함경도 홍원기생 홍랑을 꼽기도 한다. 하지만 황진이 대신 이난향을 넣기도 한다.
황진이는 지금까지 어느 자료에도 태어난 시기와 죽은 날이 기록이 없으며, 어느 황씨인지도 역사적 자료에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그녀의 성이 황씨고 본명이 진(眞)이라고 알려졌고, 일명 진랑(眞娘)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기명(기생의 이름)은 명월(明月)이며, 개성 출신이라고 한다.
황진이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없고, 간접자료인 야사만 많이 남아 있다.
이 자료들은 황진이에 대한 일화가 과장되어 있거나 미화되어 실제적인 면이 어디까지인지 확연히 구분하기 어렵다고 한다.
유교적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기생이 되었으나,
학식과 교양, 그리고 절개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이름난 기생들.... 기생이라고 해서 나쁜 의미로만 받아들여서는 안되지않을까?
번외 이야기 ♣명월관 기생 홍련
몇 년전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에 남자의 머리와 여성 생식기가 포르말린 용액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는 일제 강점기때 사이비 종교였던 백백교 교주의 머리와 명월관 기생의 생식기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남자의 머리는 백백교 교주인 "전용해"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여성 생식기의 주인은 누구인지 베일에 싸여 있었다.
다만 구전으로는 당시 유명한 ‘명월관’ 기생 "명월이"의 생식기로 알려 졌지만 과연 명월이가 누구인지는 알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궁굼증을 풀기위해 당시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일본 화가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亭, 1882~1958)에 주목했다 한다.
이시이는 우리나라 근대 화가의 선구자인 이중섭 선생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
그는 1918년과 1921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 각지를 돌며 주로 인물화를 그렸으며 이시이와 명월관 기생 ‘홍련’이 사랑에 빠졌었다는 일화는 지금까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러던중 일본 마쓰모토시의 시립미술관에 이시이가 그린 ‘홍련’의 실물 그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가 특별관람실에서 ‘홍련’의 실물 그림을 볼수 있었다 한다.
그림속의 홍련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으나 얼굴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슬펐다고..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이나 한듯 ...
허지만 명월관 최고의 기생임을 상징하듯 왼손에는 금가락지 세 개를 끼고 있었고 옷고름에는 금 노리개가 달려 있었다 한다.
이 그림은 1918년에 그려졌고 그림 속 주인공의 이름은 ‘홍련’(紅蓮).
그림의 배경으로 볼때 홍련의 방에서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 1918년은 이시이가 조선에서 활동할 시기였으며 이때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1909년에 개업한 명월관은 1918년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조선 최고의 기생집 이었으며 이로 인해 일본과 조선의 고관대작들이 자주 들렀던 곳이었다.
당시 명월관의 최고 기생은 ‘명월이’로 불렸지만 예명과 본명은 따로 있었는데,
그 당시 최고의인기를 누리고 있던 기생이 바로 명월이로 불리는 "홍련"이었으며 국과수에 보관 중인 생식기의 상태 등으로 볼때 사망시점도 20대말로 추정되고 있어
‘생식기의 주인공’과 "홍련" 을 동일인물로 볼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여러정황으로 볼때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명월이는 홍련이었으며,
또 일본 화가 이시이와의 사랑, 기생으로서 농익은 20대말 이라는점 등을 종합할때 국과수 생식기의 주인공과 명월관 기생 홍련이 상당히 부합한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옛부터 천하의 명기란 질 안에 지렁이 모양의 가느다란 주름이 많고 질 천장쪽에는 좁쌀(질벽에 돋아있는 돌기)이 가득 달려있으며 선천척으로 질 입구가 좁아야 하고 괄약근의 탄력성이 강해야 명기라 했단다.
또한 여성질환도 없어야 하며 질의 방향도 다소 밑쪽에 있어야면 명기에 이른다 한다.
그녀가 많은 기생들을 제치고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녀의 생식기 때문이었다 하는데 과연 그녀의 생식기가 어떠했길래 유명해진 것일까?
일제시제때 수도 경성을 뒤흔들었던 기생 홍련...
희대의 요부라 불리웠던 명월이 ...
어떠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당시 그녀와 잠을 잔 남성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 두를 정도 였으며 가끔 복상사를 당한 경우도 있었지만 아침이면 눈이 풀리고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한다.
복상사는 남녀가 성관계중 남성이 너무 희열에 들떠 혈압이 상승하고 맥박이 빨라지고 숨을 쉴쉬가 없는 무아지경을 헤메는 것인데 이를 의학적으로는 심장마비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
이렇듯 명월이의 탁월한 생식기는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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