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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신화 창조의 과정 - 1



제1집 : 전문가를 무색케 한 「난 알아요」 


□ 92년 3월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으며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후 10대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우상으로 자리잡았음 

- 당시 최고의 작곡가로 불리우던 H씨는 리듬은 좋으나 멜로디가 빈약하다고 혹평한 바 있는데 이는 기존의 음악 스타일을 주도하고 있던 기득권 층에게는 이해할 수 없고 수용될 수 없었기 때문임 

- 그러나 랩과 독특한 회오리춤으로 결합된 「난 알아요」는 새로운 것을 갈구하던 10대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무난히 밀리언 셀러에 진입 

- 결국 이 한장의 음반으로 발라드와 트로트가 지배하던 한국 대중음악을 댄스뮤직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꿔 버렸으며, 이후 수많은 댄스팀의 출현이 이어졌음 

《 비틀즈를 알아보지 못했던 기성계층 》 

- 비틀즈도 데뷔 당시 Decca레코드사 등과 계약하려다가 ‘기타연주가 유행에 뒤떨어진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여러 음반사를 전전한 끝에 EMI와 계약 

- 60년대 전세계 대중음악을 주도한 비틀즈는 총 2억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 

- 70년 팀이 해체된 이후에 나온 음반들도 계속 빌보드 차트 상위에 진입 

- 세계 정상의 클래식 음악가들이 앞다투어 비틀즈 음악을 취입하였는데, 이는 예외없이 히트음반화 


□ 음악의 조류 변화를 남보다 한걸음 앞서서 보는 능력과 함께 튼튼한 음악적 밑바탕이 있었기에 이러한 성공이 가능하였음 

- 서태지 스스로 프로듀싱, 엔지니어링, 작사, 작곡 및 편곡을 할 정도로 음악적 능력이 탁월 

- 댄스뮤직이 다른 장르보다 음악성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일시에 불식 


제2집 : 힙합과 국악의 만남 「하여가」 

* 힙합 : 대도시에 사는 아프로-어메리칸 신세대들의 패션, 춤, 노래, 의식 및 생활양식 등이 하나의 스타일로 정착된 문화현상으로서 힙을 흔들며 박자를 맞추는 유형의 음악을 총칭 

□ 1집의 성공으로 정상에 올라 있던 서태지는 돌연 2집앨범 제작을 이유로 팬의 곁을 떠남 

- 시한부 활동중단이라는 컨셉은 일단 앨범이 어느 정도 히트하면 철처하게 우려먹는 당시의 기존관행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 

- 제작완성도를 높이겠다는 의도의 잠정 은퇴는 새 앨범에 내용에 대해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는 홍보전략과 맞물려 앨범 발매전 사전 주문량이 100만장 이상이라는 신화를 탄생시킴 

-「앨범 발표 → 히트행진 → 전격 활동중단 → 콘서트 → 새노래 발표」의 새로운 방식은 이후 업계의 규범으로 정착 

□ 93년 6월 힙합음악에 국악을 접목시킨 「하여가」를 타이틀로 2집을 출시하고 활동을 재개함 

- 1집의 성공에 힙입어 다양한 음악적 시도가 가능하였으며, 태평소 소리를 집어넣어 거부감보다는‘역시 서태지’라는 인식이 확산 

- 상표를 떼지 않은 옷을 입고 방송에 출연하자마자 10대의 유행이 되어 버렸으며 강력한 문화선도자로서의 자리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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