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최동원 선수가 만들려고 했던 선수협과 지금의 선수협회 - 2


1988년, 최동원은 선수협의회를 결성하고자 했다. 해태 타이거즈 투수 김대현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선수 복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같이 운동을 하던 선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 생계비나 선수들의 경조사비, 연금 같은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수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명예욕에 따른 움직임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최동원은 “나는 1억 원의 연봉을 받는 선수였다. 그 돈이면 당시 강남에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내 욕심을 위해서라면 선수협을 결성할 필요가 없었다. 어려운 동료들을 돕고 싶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구단들의 강한 반발에 밀려 선수협 결성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해 11월 최동원은 투수 오명록, 포수 김성현과 함께 삼성 투수 김시진, 전용권, 내야수 오대석, 외야수 허규옥을 상대로 한 3:4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롯데가 아닌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는 것은 최동원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트레이드 사실보다 최동원을 힘들게 한 것은 구단이 자신의 의도를 본의와 다르게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구단에 대한 섭섭한 마음과 함께 선수 생활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최동원은 1990년까지 삼성에서 뛰었고 1991년 시즌이 시작하기 전 마운드를 떠났다. 가족들과 의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2살이었다. 아마추어 야구 시절부터 혹사 당한 게 조기 은퇴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었다.


“아마추어 시절이나 프로에서 무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대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 세 글자에 부끄럽지 않게 맡은 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당시 선수협 법률자문을 맡았던 문재인변호사(현재 국회의원)가 사실을 나중에 트위터를 통해 알려졌다.


선수협 주동자라는 꼬리표는 은퇴 후에도 최동원 선수를 괴롭혔다. 구단 어디에서도 불려주지 않았던 최 선수는 은퇴 10년 만에서야 2000년 이광환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한화 투수코치로 지도자 세계에 입문했다. 그후 한화 2군 감독으로 역임했고 2009년부터 한국야구위원회 경기운영위원으로 일했다. 


 

※마빈 밀러와 미국 프로야구 선수노조 


1966년 노동경제학자 출신으로 자동차부문 산업노조에서 단체협상 실무를 쌓아온 마빈 밀러(Marvin Miller)가 선수협 수석 고문을 맡으면서 크게 변화했다. 경영진을 생리를 꿰뚫으며 산업노조 활동에서 큰 성과를 거뒀던 밀러는 구단과 대등한 화력의 무기를 갖추지 않고서는 협상에 이길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무기는 노동법에서 구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선수협회를 법적으로 인정받는 노동조합으로 전환해야만 구단에 애걸복걸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역설했다. 미국 사회의 어느 업종을 둘러봐도 보수와 노동조건을 협상하면서 야구선수들처럼 저자세를 취하는 데는 없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마빈 밀러의 설득과 선수들의 결의가 합쳐진 이후의 사태 전개는 미국 야구계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로 나타났다. 1967년 사상 처음으로 단체협상이란 것이 이뤄졌다. 그 결과 ‘선수 협약’(players agreement)이 마련됐고, 실제로 메이저리그 최저 연봉을 7,000달러에서 1만 달러로 올려놓기도 했다. 그 외에도 구단측이 협약을 어겼을 경우 적법한 고충처리 절차도 마련했고, 2년 협약 유효기간 중에는 연봉조정 원칙을 변경하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 프로야구 선수들은 노동협상 전문가 마빈 밀러의 도움으로 그들이 직접 참여하고 운영하는 결사체를 통해 자신들의 권리와 복지를 온전히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2015년 선수협회


그런데 원고 6명이 일방 해고를 당해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끝내 이들이 야구계를 떠나기로 결정하고 변호사를 선임해 법적 대응을 택한 이유다.
 
이들은 앞서 밝힌대로 구단에게 미지급 잔여금 지불을 청했지만 묵살당하자 KBO로 가서 중재나 도움 등에 나서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KBO는 이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KBO는 구단별 65명의 엔트리에 속한 선수가 아닌 신고선수 선발에 관여하지 않았고 따라서 계약서가 KBO에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이후 이들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수협도 이들의 외침을 외면했다. "신고선수는 선수협 회원이 아니다"라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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