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및 기타 지역의 정경 형성


동방의 정경 형성

안디옥 주교 이그나티우스(116년경), 서머나 주교 폴리카르푸스(69-155년경), 히에라폴리스 주교 파피아스(80-155년경)는 마태복음, 요한복음, 바울서신, 베드로전서, 요한1서, 사도행전에 대해서 증언했다. 12사도의 교훈집(120년경)은 마태복음을 특히 많이 언급하고 대부분 신약성경과 마찬가지로 누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사르디스 주교 멜리투수(170년경)는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 2.3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신약성경을 인용했다. 안디옥의 데오필루스(115-118년경)는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입증하였고 이것들은 구약 정경과 동등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루키아누스(312년에 순교)는 자신의 '안디옥 정경'에서 요한계시록, 베드로후서, 요한 2.3서를 제외시켰고, 그가 개역한 구약과 신약성경에서는 유다서를 제외시켰다. 가파도키아의 대 바실리우스(329-379년경)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330-390년경)는 요한을 계시록의 기록자라고는 했으나, 이를 제외한 현재의 정경에 있는 모든 문서를 인정했다. 몹스에스티아의 데오도루스(350-428년)는 가톨릭 서신들과 요한계시록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회의 이러한 견해는 콘스탄티노플 정경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루키아누스의 '안디옥 정경'에서 발전된 것으로, 요한2.3서, 베드로후서, 유다서와 요한계시록 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페쉬타(411-435년)도 콘스탄티노플 정경과 유사하였다. 필로크세누스(508년경)가 이 부인된 책들을 첨가하여 시리아 페쉬타성경을 개정하고부터 콘스탄티노플 정경의 그릇된 영향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정경의 초기 형성

순교자 유스티누스(100-165년경)는 요한계시록에 관하여 중대한 증언을 하면서 이것을 사도 요한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히브리서를 잘 알고 있었고, '베드로의 회고록'이라는 표제가 붙은 마가복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5-215년경)는 현재 신약에 수록되어 있는 모든 문서에 정통하였으며, 유다서, 히브리서, 공동서신과 요한계시록을 포함한 모든 문서를 인정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185-253년경)는 많은 논쟁이 되었던 책들(히브리서, 베드로후서, 요한 2.3서, 야고보서, 유다서)을 인정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 인정된 책들(「호모로구메나」) 가운데 요한계시록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정경의 후기 형성

프레드릭 케년 경에 의해 1933-37년에 출판된 3세기 체스터 비티(The Chester Beatty) 파피루스 사본은 사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 히브리서(로마서 다음에 있음), 요한계시록(9:10∼17:2 부분만이 보존되고 있다)을 인증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200-265년경)는 야고보서, 요한 2.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영감된 성경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히브리서가 바울서신임을 증언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298-373년)는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27권의 신약성경에 대하여 '정경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신약 정경 형성사의 요약

신약 정경은 교회협의회의 활동을 통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개개의 책들이 지닌 영감성과 내적인 권위가 그것들을 궁극적으로 인정하고 정경화하는 결정적인 요소를 이루었다. AD 200년에 이르러서야 신약은 본질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문서들을 포함하였다. 그 후 이것들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오늘날과 같은 권위와 확실성을 지니게 되었다. 3세기에는 「안티레고메나」로 논쟁이 벌어졌다. 동방에서는 요한계시록을 인정치 아니하였으며, 서방에서는 히브리서를 부정하였다. 실제적으로 3세기 말에 가서야 모든 외경서들이 히에로니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 그리고 이집트 아타나시우스의 정경이 설정한 명확한 구분으로 실제로 어떠한 문서가 정경의 지위를 갖는가에 대한 논쟁은 그치게 되었다. 제3차 카르타고 교회회의(397년)는 이 결정을 확증하였으며, 이때부터는 어느 신약 문서에 대한 논쟁도 그치게 되었다. 동방에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서방과 알렉산드리아 아타나시우스의 경우,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영향은 모든 반론을 일축시켜 버렸다. 페쉬타(시리아 성경)에 요한 2.3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을 첨가함으로써 정경에 대한 문제는 동방 역시 해결되었다. 그리하여 신약 정경은 모든 실제적인 목적에 맞추어 서방에서는 400년에, 동방에서는 500년에 이르러 그 결정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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