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의 정경 형성 과정


서방의 정경 초기 형성

로마의 클레멘스의 증언(AD 96년경) 그가 로마 주교로 있을 당시 고린도교회에 보낸 매우 정평있는 편지에서(제1클레멘스로 알려짐), 그는 마태복음, 로마서, 고린도전서에 대한 지식을 보여 주며 히브리서에 대하여 거듭해서 언급하고 있다.

마르키온의 증언(140년경) 영지주의 이단자로서 그는 다만 누가복음과 바울서신 중 10편만을 인정했다. 다소 잘못된 점은 있으나 그의 증거는 계몽적이며 교회가 현재의 신약성경을 수집하고 인정하는 데 중요한 지표를 형성케 하고 있다.

헤르마스의 증언(150년경) 그는 매우 정평있는 헤르마스 목자서의 기록자로서 마태복음, 에베소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특히 요한계시록을 정경으로 확증하였다.

이레나이우스의 증언(40-203년경) 그는 청년 시절에 서머나의 폴리카르푸스와 교분이 있었으며, 후일 고올지방 리용의 주교로서 사복음서, 사도행전, 베드로전서, 요한1서, 빌레몬서를 제외한 바울의 모든 편지와 요한계시록을 입증하였다.

무라토리 정경의 증언(172년경) 이 단편문서는 1740년 밀란의 암브로시우스 도서관에서 이탈리아인 무라토리가 발견했다. 삭제된 처음 부분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었다. 이것은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히브리서를 제외한 모든 신약 문서에 대해 입증하고 있다.

170년 이전의 고대 라틴어역 증언 이것은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그리고 테르톨리아누스시대 이전에 첨가된 히브리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문서들에 대하여 입증하고 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증언(150-222년경) 이 카르타고의 다작의 라틴 작가는 사복음서, 13편의 바울서신, 사도행전, 베드로전서, 요한1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히브리서의 기록자는 바나바라고 하면서 이를 넣지 않았다.

키프리아누스의 증언(200-258년경) 카르타고 주교로 히브리서에 대해서는 테르툴리아누스의 견해를 따랐다. 그러나 빌레몬서, 야고보서, 요한 2.3서, 유다서는 인용하지 않았다.

서방의 정경 후기 형성

히에로니무스의 증언(340-420년경) 그는 라틴어 불가타역의 뛰어난 번역자이며 명성있는 학자로서, 우리가 소유한 신약 정경 모두를 증언했다. 그는 바울에 의해 히브리서가 기록되었음을 인정하였고, 야고보서와 베드로후서가 어떻게 인정될 수 있는가를 설명했다. 그의 견해는 최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의 증언(354-430년) 히에로니무스와는 달리 그의 견해는 모호했다. 그는 문제시되었던 일곱 권의 책을 모두 수락하기는 했으나 성경의 권위에 정도의 차이를 두고 대체로 외경을 포함하여 폭넓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구약 경전 확립에 기여하였다.

교회협의회의 활동 신약 정경의 한계를 정하는 문제는 어떠한 협의회에서도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개개의 문서가 지닌 영감적인 가치나 내적인 권위가 그 결정요소였다. 이러한 사실은 정경 가운데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문서의 순수함이나 확실성에서 뚜렷하게 증명되고 있다. 4세기 말 이전 어떠한 협의회도 이런 주제에 관해서 아무런 공언도 하지 못하였다.

카르타고 제3차 교회회의(397년) 여기에서 정경에 대한 최초의 결정을 내렸다. 이 회의에서 규정된 사항 중의 하나는 교회내에서는 오로지 '정경으로 인정된' 책만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에 이것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27권의 목록이 되었다. 히브리서는 바울의 것이라는 이유로 인정되었다. 히포 교회회의(419년)는 제3차 카르타고 교회회의의 목록을 거듭 확인하였다. 이처럼 정경의 선정은 개개의 책들이 자체의 가치를 입증한 후 교회회의에서 확인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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