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탈출 갈라잡이1- 나는 여기 왜 있는가, 권하는 말 by 미국에 와 있는 놈 - 2

앞에서 이어짐.

네덜란드



월급만이 문제가 아니 였습니다. 가끔 정통부 등의 새파란 행시출신들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분위기에서 그들에게 머슴 취급 당했던 것이 그분에게는 치명적 이였던 것 같았습니다. 독일에서 공대교수생활하면서 사회적 존경과 안정적 생활을 뒤로하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래도 대한민국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좋다는 소박한 생각, 그래도 한국이 좋겠지 하는 막역한 정서적 느낌들 때문에 천박한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 그 분에게 돌이킬 수 실수 였던 것입니다.

기축 통화가 있어서 미국과 같이 돈 장사로도 충분히 먹고 살수 있는 나라가 아닌 이상, 일본도 그렇고 ,독일도 공업과 과학기술로 승부를 걸었고, 뛰어난 엔지니어를 키워서 국부를 증강, 유지 시켜 왔기에 엔지니어의 대우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남달랐기에 그 분의 충격은 더 큰 것 같았습니다.

그 후 다음과 같은 재미 있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임진왜란 때의 도공(세라믹 엔지니어)들이 납치 되어 같다는 것은 반만 진실이다. 대부분은 자신해서 일본 행을 선택했다." 이 얘기를 지금 하는 것이 재 견해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얘기는 이렇습니다. 임진왜란 때의 일본군은 (노예)장사 속으로도 조선인을 납치해 갔습니다. 그 중에 도공도 끼여 있었겠지요. 막부의 요구에 의해서건, 자발적이건 간에 세계최고 수준의 한국의 세라믹 엔지니어는 일본에서 보지도 못한 도기를 만들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사람취급 받지 못했던 도공들, 노예의 입장인 도공들을 무사 지배 계급들(막부, 사무라이)의 주목을 받았던 것입니다.

한국에서 늘 천대 받던 도공들이 막부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막부가 아닌 다른 이들의 그들에 대우가 어떠 했겠습니까? 막부는 집도 주었고, 때로 아름다운 여인도 주었습니다. 도자기가 막부의 삶의 질을 개선했을 뿐만이 아니라, 장사가 되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는 것이 그 당시 일본의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다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은 팔자를 고친 것입니다. 부와, 명예와 사회적 명성을 얻은 거지요. 막부나, 사무라이와 같은 일본 사회의 지배 무사계급은 아니지만 조선에서 돈 않되 는 탁상공론과 당파싸움(요즘 정치인들처럼)에 날을 지새고 한시나 달달 외우며 혼자 잘난 맛에 사는 소위 양반들의 허세와 멸시를 받는 조선에서의 그들의 위치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을 것입니다.


정유재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막부의 사랑과 일본 사회에서 존경을 받던 도공들은 일본 군인들과 같은 배를 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 였습니다.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서 자기들처럼 팔자를 고치지 못하고 천대 받고 사는 옛 동료들을 스카우트하러 간 것 이였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친구들로부터 전혀 딴 세상 얘기를 들었던 당대 세계 최고의 조선의 세라믹 엔지니어들 중 상당수는 그 때 자발적으로 일본 배에 몸을 실었다고 합니다. 소위 기술 이민이지요.

이 일이 있은 후에 일본의 세라믹 기술은 조선을 추월 했고, 아직도 한국은 일본의 세라믹 기술을 쫓아가지 못한다고 하지요. 어디, 예가 세라믹 기술 뿐이 겠습니까?



다음의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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